실의 궤적
우리가 한 번에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삶이란 결국 좁은 창을 통해 한 올씩 짜여가는 실이 아닐까.
1. 좁은 창
우리가 한 번에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의식은 문장 하나, 혹은 단어 몇 개에 머물러 있다. 조금 전 읽은 문장은 이미 기억 속으로 밀려났고, 아직 읽지 않은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라는 좁은 창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나는 이 사실이 꽤 오랫동안 불편했다.
우리는 스스로 넓은 시야를 가졌다고 믿는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복잡한 문제를 분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창을 통해 일어난다. 과거를 떠올릴 때, 과거 자체가 아니라 '지금 떠올린 과거'가 의식에 들어온다. 미래를 계획할 때도 '지금 상상한 미래'일 뿐이다.
생각이 행동을 결정한다면, 그리고 의식의 창이 이토록 좁다면, 인생이란 결국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하나의 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확신은 없다. 다만 이렇게 보면 몇 가지가 설명이 된다.
2. 생각의 실타래
실을 상상해보자. 가늘고 긴, 시작과 끝이 있는 선.
매 순간 우리의 좁은 의식 창에는 하나의 생각이 들어온다. 그 생각은 다음 생각을 부르고, 그 생각은 또 다음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연속체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삶이다—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가.
솔직히, 이 비유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생각은 분기하고, 되돌아가고, 엉키기도 하니까. 어쩌면 삶은 단일한 실이라기보다 매 순간 여러 가닥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선택되지 않은 가닥들은 사라지고, 선택된 것만 남아서 뒤돌아보면 하나의 선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어쨌든 확실한 건, 그 실이 혼자 짜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의 말, 친구의 표정, 스쳐 지나간 책의 한 문장, 우연히 본 영상. 우리의 좁은 창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는 대부분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 타인의 삶, 사회의 흐름, 시대의 공기가 우리의 창문 앞을 지나간다. 그것들이 들어와 생각이 되고, 생각이 쌓여 우리가 된다.
이게 위안인지 공포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3. 경로의존성
여기서 좀 불편한 얘기를 해야 한다.
실은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경제학에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선택지를 제약한다는 것이다. 한번 깔린 철로는 쉽게 바뀌지 않고, 그 철로 위에서 다음 역이 결정된다.
당신이 매일 엘리베이터를 탄다고 해보자. 문이 열리면 어디에 서는가?
아마 거의 매번 같은 위치일 것이다. 같은 구석, 같은 각도, 같은 시선 처리. 누가 정해준 적 없다. 그냥 어느 날 그렇게 섰고, 다음 날도 그랬고, 이제는 그것이 '나의 방식'이 되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이게 좀 무섭다.
생각도 이렇게 굳어진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무시할지, 무엇에 화가 나고 무엇에 기뻐하는지. 이것들이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 믿고 싶지만, 사실은 오랜 시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온 관성의 결과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믿지만, 이미 놓인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나도 그렇다. 내가 '나답다'고 느끼는 생각들, 그게 정말 내가 선택한 건지, 아니면 그냥 굳어진 건지, 솔직히 구분이 안 된다.
4. 생각을 바꾸려면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생각 자체를 공략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내 경험상 그렇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해본 적이 있다. 효과가 있었냐면, 없었다. 며칠, 길어야 몇 주. 그러다 어느 순간 원래의 사고 패턴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러 번 그랬다.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관성이 너무 강하다.
내가 찾은 답—이라기보다 가설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좁은 의식 창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는 환경이 결정한다. 어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는지, 어떤 정보를 접하는지. 이것들이 바뀌면 창에 들어오는 것이 바뀌고, 들어오는 것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실의 방향이 바뀐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5. 의식이 있을 때
문제는 환경을 바꾸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자동 모드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같은 경로로 출근하고,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같은 패턴으로 쉰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동화는 효율적이다. 매번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금방 지쳐버린다.
하지만 자동 모드에서는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환경은 그냥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인다. 엘리베이터의 같은 구석에 서고, 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가끔 의식이 켜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충격, 어떤 질문, 어떤 만남이 우리를 멈추게 할 때.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물음이 떠오를 때. 그 순간, 잠시 자동 모드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 생각에, 그때 환경을 바꿔야 한다.
의식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곧 다시 자동 모드로 돌아간다. 돌아가기 전에, 의식이 켜져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뭔가를 바꿔놔야 한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접하는 정보의 통로를 바꾸거나, 물리적 공간을 바꾸거나.
이게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렇게밖에 못 찾았다.
6. 선배들의 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우리는 그것을 철학이라 부르거나, 문학이라 부르거나, 지혜라 부른다.
한때 나는 이런 기록들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이렇게 살면 되는구나"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안 됐다. 그들의 시대와 내 시대가 다르고, 그들의 환경과 내 환경이 다르다. 같은 패턴을 적용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그들이 남긴 것은 "이렇게 살아라"라는 정답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짜보았다"라는 하나의 사례다. 참고할 수 있는 패턴이지, 복사할 수 있는 템플릿이 아니다.
그 패턴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7. 서로의 환경
여기까지 쓰면서 한 가지 생각이 계속 걸린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라는 것.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 내가 보여주는 행동. 이것들은 누군가의 좁은 창에 들어간다.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의 실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솔직히 이건 좀 무겁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환경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쁜 환경이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의도와 결과는 다르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내 실을 좀 더 신경 써서 짜면, 그게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확신은 없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도.
8. 짜여가는 중
삶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은 짜여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 의식 창에는 무언가가 계속 들어왔고, 그것이 이 글의 방향을 조금씩 바꿨다. 처음 쓰려던 것과 지금 쓴 것이 다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가끔 의식이 켜질 때, 자신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 그 환경이 내 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 아니라면, 의식이 꺼지기 전에 뭔가를 조금 바꿔두는 것.
이게 맞는 방법인지는 모른다. 삶이 정말 실인지도 모른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의 한 올은 내가 짜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